지난 2월 18일, 상수역 부근의 막걸리펍 무명집에서 막걸리 시음회가 있었습니다.


무명집은 예전에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막걸리도 좋았지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안주가 맛있어서 살짝 놀라기도 했던 집입니다. 

가게 한쪽 벽에 보면 “설탕/물엿 대신 전남 벌교 유기농 매실 원액을 사용하며, 인공감미료를 최소화하면서 맛을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라는 글귀가 보입니다. 


처음 마신 술은 천안 입장주조의 연미주. 막걸리 시음회에 왔는데 청주로 시작을 하네요. 사장님께서 웃으며 식전주라는 말씀을 해주시는군요. 확실히 부드럽고 깔끔하면서 산미가 살짝 도는 것이 식전주로 마시기 적합한 듯합니다.

일반적으로 한약재가 들어간 술은, 부재료로 작용해야 할 한약재가 자기주장을 넘 강하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연미주는 맛과 풍미를 더하는 정도로만 넣으셔서 은은한 향도 맛도 좋은 술이네요.


이제 입장 탁주로 본격적인 막걸리 시음을 시작합니다. 마셔보니 주당들이 좋아할 만한 술이라는 느낌이 드는 게, 벌컥벌컥 마셨을 때 목 넘김이 기분 좋게 다가오는군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날 마신 술이 유통기한이 상당히(정확한 기억은 아닌데 대략 열흘인가 보름인가) 지난 술이었음에도 맛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는 거죠. 보통 막걸리의 유통기한이 10일 정도이고, 입장 탁주의 유통기한은 29일로 꽤 긴 편인데 그 유통기한을 넘어서도 맛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이날 동석하신 분 얘기로는 입장 탁주 한 짝(30병)을 석 달에 걸쳐 먹었는데 맛에 지장이 없더라는 말씀도.(물론 냉장보관은 잘해야겠죠)

어째서 유통기한이 이렇게 길고 심지어 실제 상미기간은 더욱더 긴 것인지에 대해서, 입장 탁주는 무증자 생쌀발효(쉽게 말해서 찌지 않은 생쌀로 만들었다는 얘기)로 만든 술이라서 그렇다는 얘기가 있더군요. 일반적으로 막걸리는 쌀(쌀가루)을 익혀서 발효시켜 만드는데, 무증자 생쌀발표는 익히지 않은 생쌀로 술을 만드는 거죠. 널리 알려진 생쌀발효 막걸리로는 배상면주가의 느린마을 막걸리 국순당의 우국생이 있는데, 느린마을 막걸리는 유통기한이 10일 우국생은 한 달이군요. 우국생은 발효제어기술로 유통기한을 늘렸다는데, 실제로는 60~70일에서 최대 90일까지 가능하나 법적으로 막걸리에 표시할 수 있는 유통기한의 최대치가 30일로 정해져 있어 30일로 표시한다고 하네요.(물론 생막걸리에 한해서. 멸균 막걸리는 유통기한이 6개월에서 1년씩 되죠.)

입장 탁주도 우국생과 비슷한 경우라고 하면 이해가 되긴 하지만, 같은 생쌀발효 막걸리면서도 어째서 느린마을 막걸리는 유통기한이 10일인지, 우국생의 발효제어기술이라는 것이 실재하는 것인지(또는 '기술'이라고 할만한 스페셜한 무엇인지) 등의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맛은 느린마을 막걸리나 우국생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습니다만. 느린마을 막걸리는 처음에는 맛이 괜찮았는데 요즘에는 맛이 변했다든가, 맛이 그때그때 다르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적어도 제가 최근에 먹어봤을 때는 대략... -_-;)


인사도 하고 건배도 하고 하는 사이에 모듬전이 나왔습니다(1만 8천 원). 두부부침을 먼저 맛봤는데 두부 맛도 좋고 조리솜씨도 훌륭하셔서 감탄을. 녹두전과 고기완자도 아주 맛있었구요. 공덕동 전집들이나 홍대 걷고싶은 거리에 있는 전집들과는 퀄리티가 비교불가네요.(당연히 이쪽이 위)


반반전(1만 8천 원). 해물파전과 김치전을 반반씩 부쳐내는 아이디어 메뉴네요. 피자에서의 하프앤하프 같은 발상이 좋군요. 그런데 맛은 모듬전에 비하면 조금 평범하네요.


드디어 문제의 송명섭 막걸리(500ml 6천 원, 1리터 1만 원). 막걸리 좋아하시는 분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술입니다만, 그만큼 말도 많고 탈고 많다고나 할까요.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직접 마셔본 건 이날이 처음이었습니다.

맛에 대해서는 흔히 달지 않다고들 많이 이야기를 하는데, 직접 먹어보니 그 이상이더군요. 적어도 이날 제가 느낀 송명섭 막걸리의 맛은 오미가 실종된 맛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단맛 신맛 짠맛 쓴맛 매운맛에 하나 더해서 떫은맛까지도 느껴지지가 않더군요. 맛을 굳이 말하자면 쌀가루를 물에 개어놓으면 이런 맛이 나지 않을까 싶을 그런 맛이었달까요.

무명집 사장님께서도 송명섭 막걸리의 맛을 이해하는 데 두 달이 걸렸다고 하시며, 오픈한지 꽤 된 지금까지도 송명섭 막걸리를 주문하는 손님이 있으면 엔간한 단골 아니면 계속해서 신경도 쓰이고 걱정도 되고 하신다는 말씀을. 막걸리 좀 드셨다는 분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막걸리 중 하나로 회자되는 술입니다만, 막걸리집 주인이 이해하는 데 두 달 걸린 술을 술도 잘 못 마시는 제가 이해할 날이 올지 자신이 없어지더군요.

 
새로운 안주가 등장합니다. 남도젓갈 백김치 세트(2만 3천 원). 낙지젓, 어리굴젓, 조개젓이 백김치, 야채, 쌈장과 함께 나옵니다. 젓갈과 백김치는 주방에서 직접 담그신다고. 시중에서 파는 젓갈처럼 과하게 자극적인 맛이 아니라 건강한 맛이 느껴집니다. 근데 사실 제일 맛있었던 건 쌈장(...). 그래서 쌈장을 전에 발라서 먹었어요... 맛있게도 얌얌.


이번에는 맛과 특이성(?)을 겸비한 막걸리로 유명한 복순도가 손막걸리가 나왔습니다(1리터 2만 원). 개봉 시의 임팩트가 대단한데, 사진으로는 충분한 전달이 어렵기에 동영상 촬영을 해봤네요. ^^



뚜껑을 개봉하는 순간 천연탄산이 끓어오르며, 솟아오르는 기포들이 바닥의 침전물을 윗물과 섞어줍니다. 처음부터 뚜껑을 완전히 열었다가는 샴페인 흔들고 땄을 때 마냥 술이 흘러넘칠 수 있으니 마개를 적절히 돌려가며 가스를 빼주면서 열어야 하죠. 무명집에서는 주문이 들어오면 사장님께서 직접 따주신다고 하네요. 이날은 사장님께서 따시진 않고 동석한 분 중 경험 많은 분이 계셔서 사고 없이 무사히 개봉을 마쳤습니다.


맛을 보니 상큼한 과일 향과 자연스러운 산미, 고급스러운 단맛이 고급 막걸리란 어떤 것인가를 확실하게 느끼게 해 주네요. 천연탄산이 가져다주는 청량감 또한 좋은 느낌을 더해주는데, 이게 올리고당을 잔뜩 집어넣어 억지로 만들어낸(당이 발효되면서 알코올과 탄산으로 분해) 싸구려 막걸리의 과한 탄산 느낌이 아닌, 마치 샴페인의 기포와도 같이 은은하면서 자연스러운 청량감이 느껴지는 게 좋더군요. 이날 먹은 막걸리 중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사실 복순도가 손막걸리는 시음 리스트에 없던 물건이었는데, 현장 분위기가 좋다 보니 참석하신 분 중 한 분이 자비로 한 병을 쏘셨습니다. 협찬해주신 박xx 님께 무한 감사를... 덕분에 최고의 막걸리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


드디어 막걸리 안주계의 대마왕 홍어삼합이 등장(2만 3천 원). 대중적으로 맞추기 위해 홍어를 많이 삭히지는 않으셨다고 하는데... 서울서 곱게 자란(^^;) 저로서는 이것도 먹기가 쉽지 않더군요. ㅠㅠ (아아... 사진만 봐도 그때 그 냄새가 코로 올라오는 기분... ㅠㅠ) 반면에 전라도쪽 분들은 냄새가 제대로 안 난다는 코멘트를... 삼겹살 수육은 입에서 살살 녹는 것이 아주 좋았네요.


이번에는 자희향 탁주를 개봉해 봅니다(500ml 1만 5천 원). 자희향은 앞서 마셨던 복순도가 손막걸리와 더불어 고급 막걸리의 대명사로 불리는 술 중 하나인데요. 과일 향과 산미, 단맛 등 복순도가 손막걸리의 그것과 유사한 특징이 있습니다만, 도수가 12도인 만큼 좀 더 단맛도 강하고 보다 끈적한 느낌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막걸리는 12도의 원주를 희석해서 도수를 6도로 만드는데, 자희향은 희석하지 않은 원주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농도가 더 진하다 보니 이런 느낌이 드는 거죠.

다만, 복순도가 손막걸리가 완성형이라는 느낌이라면 자희향 탁주는 맛이 살짝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 들어 근소한 차로 이날의 2위로 밀려 버렸네요. 하지만 이날 먹은 자희향은 바로 올라온 새 술이었고, 제가 예전에 자희향 탁주를 먹어본 바로는 좀 더 냉장 숙성시키면 잡미와 산미가 줄어들고 마치 우유 같은 맛이 나면서 맛에 깊이가 생기더군요.(어느 분의 시음기를 보니 숙성시키면 요거트 맛이 난다는 얘기도) 자희향의 유통기한은 한 달이고 저는 보름 좀 넘게 숙성시켜서 먹었는데요, 이렇게 숙성시킨 자희향이라면 복순도가 손막걸리와 자웅을 겨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번 안주는 연어 샐러드(1만 8천 원). 막걸리와 샐러드가 어울릴까 하는 생각들 하시겠지만, 저질 막걸리가 아닌 제대로 된 막걸리와 함께 먹으니 가벼운 안주로 나쁘지 않더군요.


무명집 사장님께서 발굴(?)해서 밀고 계시다는 대대포 막걸리(500ml 6천 원, 1리터 1만 원). 잘 알려지지 않은 막걸리였는데, 무명집 사장님께서 맛을 보고 가게 주력상품으로 삼았다고 하시네요. 친분이 있는 타 막걸리집에도 적극 추천하셔서 지금은 취급점이 여럿 생겼다고 합니다.

맛을 보니 벌꿀이 들어가서 그런지 복합적인 단맛이 나네요. 물론 그 단맛이라는 게 올리고당이랑 아스파탐 이빠이 넣어서 만드는 그런 막걸리들과는 다른 기분 좋은 단맛이구요. 장수 막걸리에서 제대로 된 막걸리로 갓 넘어오려는 초보들에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대중성과 수준을 겸비했달까 대략 그런 느낌이네요.


차돌박이 버섯잡채(1만 5천 원). 잡채라기보다는 차돌박이 버섯 야채볶음이랄까요. 버섯도 야채도 좋아하기에 맛있게 잘 먹었네요. 당면이 넘 조금 들어있는 게 약간 불만이었지만요. ^^; 


마지막으로 마신 술은 아리랑 흑미주였네요(500ml 5천 원, 1리터 8천 원). 개인적으로 흑미가 들어간 술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흑미에서 나는 특유의 향이 있는데, 그게 술로 만들었을 때 그닥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지가 않아서 말이죠. 아리랑 흑미주는 전에 먹어본 적이 있는데, 역시나 그런 향이 나서 별로 좋은 느낌을 받지 못했었어요. 그런데 이날 먹었을 때는 향이 별로 느껴지지가 않았는데, 술을 많이 마신 끝에 감각이 무뎌진 건지, 아님 숙성이라든가 출하 후 먹은 날짜에 원인이 있는 건지 여하간 그래서 맛이 괜찮았네요. ^^;

이렇게 시음회가 끝이 났습니다. 훌륭한 막걸리와 맛난 안주들 다 너무 좋았구요. 좋은 분들과 함께 막걸리에 대해 나눈 대화들 넘 즐거웠습니다. ^^ 이번 막걸리 시음회는 무명집 사장님 블로그에서 선착순으로 신청받는 걸 우연히 보고 참가하게 됐구요. 추후에도 시음회가 있을 예정이라시니 참가 원하시는 분은 가끔 블로그 들러보시면 좋겠네요.


 본 시음회는 무료로 진행되었습니다만, 이와는 별개로  음식의 맛 평가는 가능한 객관적으로 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였습니다. 또한 연미주와 입장 탁주는 시음회를 한 시점에서 무명집에서 판매하고 있지 않았기에 가격 표시를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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