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왕십리역 2번 출구에서 멀지 않은 성화 생라멘. 간판을 보시면 '일본에서 3대째 내려오는 79년 전통'이라는 말이 쓰여있는데, 실제 이 가게는 일본 라멘 역사의 여명기를 장식한 '호프켄(ホープ軒)'이라는 라멘집과 관계가 있습니다.


호프켄(ホープ軒)은 1934년(쇼와 9년) 빈보켄(貧乏軒)이라는 라멘 포장마차로 시작을 했는데, 최초의 라멘집으로 알려진 라이라이켄(来々軒)이 1910년에 생겼고(1994년 폐점), 뿌옇고 진한 하카다 돈코츠 라멘의 원형을 산큐(三九)에서 만든 게 1947년이라고 하니, 호프켄의 역사와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이 가죠.(마트에서 파는 반조리 제품도 있을 정도)


그렇다면 성화 생라멘과 호프켄이 어떤 관계인가 하면, 성화 생라멘 사장님께서 호프켄 창업자인 난바 후미오(難波二三) 씨 가족과 친분이 있으셔서, 20년 전 신도림에서 호프켄 한국 지점을 오픈하셨다고 합니다. 어쩌다 보니 예전에 찍어두신 사진이 있는 앨범을 보게 됐는데, 상당히 큰 규모로 운영을 하셨더라구요.



유감스럽게도 결과는 좋지 않으셨지만, 그때의 연이 계속 남아 호프켄 창업자 아드님의 도움을 받아(창업자 분은 타계) 다시 한 번 라멘집을 차리셨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레시피는 호프켄에서 배우셨고, 양념(타레)도 호프켄에서 공수해서 사용하신다고 합니다. 대략 올해 7월쯤 오픈하신 것 같은데, 호프켄 창업자 아드님께서 1~2개월에 한 번씩 한국 나오셔서 점검을 하고 가신다고.



메뉴는 4가지. 돈코츠(돼지뼈), 쇼유(간장), 시오(소금), 미소(된장). 메뉴가 적은 가게는 메뉴판 순서대로 먹어보는 게 정석이죠. 첫 방문이니 돈코츠 라멘을 주문합니다.



맛을 보니 돈코츠 향이 적당히 풍기면서 심플하면서도 깊이감이 느껴지는 국물이 일품입니다. 면의 맛이나 삶은 정도도 나무랄 데 없구요. 요즘 스타일의 라멘처럼 정제되고 세련된 맛은 아닙니다만, 3대를 이어서 하는 라멘 노포에서는 이런 맛이 나겠구나 싶은 관록과 연륜의 맛이 느껴집니다.


단, 이 맛이 도쿄 키치조지의 호프켄 본점의 맛과는 조금 차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 호프켄은 돼지의 등 비계(背脂 세아부라)를 국물에 갈아 넣는 스타일의 원조라고 하는데, 성화 생라멘의 돈코츠 라멘에는 갈아 넣은 비계가 보이질 않거든요. 호프켄도 처음부터 이런 스타일이었던 것은 아니었고, 1960년대부터 이렇게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니, 성화 생라멘의 맛은 호프켄에서 비계를 갈아 넣기 이전의 맛일까요.(사실 비계를 갈아 넣기 시작한 건 창업자인 난바 씨가 아닌 호프켄 프랜차이즈 포장마차를 운영했던 우시쿠보 히데아키牛久保英昭 씨였다고 하니 뭔가 그럴듯한 가설이 아닌가 싶기도요. 지금은 두 집안이 각각 키치조지의 호프켄 본점센다가야호프켄을 운영하고 있구요.)


어쨌든 이런 일본 노포의 맛을 한국에서 느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라멘 좋아하신다면 꼭 방문해보셔야 할 곳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국내 라멘계가 하카다 돈코츠 스타일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보니, 소비자들의 입맛도 그쪽으로 고정된 감이 있어, 가보고 실망하시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 유백색의 뿌옇고 진한 국물이 하카다 돈코츠라면, 좀 더 맑으면서도 내야 할 맛은 내는 것이 도쿄 돈코츠인데 말이지요.



다른 날 방문해서 먹은 쇼유 라멘. 돈코츠와 미소는 돈코츠 베이스, 쇼유와 시오는 닭국물 베이스로 만드신다고 하네요.(이런 부분도 호프켄과는 다른 점이지요. 호프켄의 라멘은 돈코츠 하나밖에 없으니) 근데 돈코츠와 쇼유가 국물 맛의 진한 정도가 비슷해서 그런지, 얼핏 먹어보면 둘의 국물 맛이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차이가 있다면 돈코츠 라멘에서는 돈코츠 향이 난다는 점일까요. 여튼 국내 라멘집에서 닭국물 베이스로 만든 라멘을 맛있게 먹어본 적이 없는데, 성화 생라멘의 쇼유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앞으로 점포 확장이나 자가제면도 생각하고 계시다고 하는데, 보다 많은 분들의 성원이 있어야 자가제면하신 면의 맛을 좀 더 빨리 맛볼 수 있지 않을지... ^^; 맛도 좋고 가격도 착한데다, 양이 부족한 분들을 위해 공기밥도 무료로 제공되니 라멘 좋아하신다면 부담 없이 한 번 들러보시길.(오픈 초기에는 휴일 없이 운영한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혹시 모르니 방문 전에 전화 한 통 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 음식의 맛 평가는 가능한 객관적으로 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업소 방문은 2014년 8월, 9월에 이루어졌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서울시 성동구 도선동 21-1

02-2296-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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